가장 맘에 드는 말이 호연지기이다.
호연지기.
책의 내용을 적자면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꿀리지 않는 기개"
무슨 뜻일까? 대담한걸까? 아님 겁이 없는 개끼일까?
생각하기에 내 안의 힘을 철저하게 믿는다가 아닐까?
즉 나를 믿는다.
아무리 봐도 나의 힘은 작고 외부의 세력은 한없이 클때
작고도 작은 나의 힘에 철저하게 기대어 문재에 대항하여 1:1로 맞장을 뜬다.
두가지로 생각된다.
하나는 나를 움직이는 주체도 나요,
나의 생각의 발원도 나요.
오직 내가 의지해야 할 샘이 나라는 것.
두번째는 준비다.
앞서 있는 것이 무엇이든 준비된 자로서의 뚝심
가장 중요한것이 있다.
나에게 무한 에너지를 공급해주시는 주님
나의 두 손과 발에 그리고 등 뒤에서 나를 지탱해 주시는 주님
암울의 방정식을 역전의 해법으로 바꾸시는 주님.
진정한 호연지기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볼 때 취할수 있는 아이템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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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의 어느 사이트인지는 모르지만 스토리 정리된 글..
~~최초의 일본유학생 이동인
흔히 승려 이동인을 개화사상의 선두주자로서 선각자로 추켜세우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경향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를 일본의 조선침략 세
력에 부화뇌동한 전형적인 친일인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동인이 개화문물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일본정부의 침략밀명
을 받고 부산에 처음 상륙한 일본불교에의 접근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이동인은 1879년 3월 우타니 파 혼간 사의 부산별원에 드나들면서 서구
여러 나라에 관한 사진과 '만국사기', 성냥 등을 얻어서는 서울 봉원사에서
김옥균, 서재필, 유대치, 오경석 등에게 개화문물을 보여줌으로써 개화파와
교류를 하였던 것이다.
이동인이 혼가 사 부산별원에 드나들었다는 것은 오쿠무라의 '조선국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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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에 의하면 1878년 6월 2일부터 2회, 12월 9일부터 4회에 걸쳐 드나들었
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의 개화문물에 관한 접촉은 조선침략을
위한 전초기지였던 일본불교인 혼간 사 부산별원이었음이 확실하다.
이동인은 양산 통도사의 승려인데 오쿠무라와의 접촉으로 개화 문물을 손
에 넣은 다음에는 서울에 올라와, 봉원사에서 김옥균,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
파들과 교류하면서 김옥균이 여비로 준 금덩이 네 개를 오쿠무라에게 내보
이면서 일본 도항을 부탁하였다. 이리하여 이동인은 오쿠무라와 마에다 영
사의 주선으로 교토에 가서 그곳 혼간 사(본산)에 머물면서 일본어를 배웠
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득도식을 가져 일본 진종의 승려가 되었고, 도쿄
아사쿠사 별원에 기숙하면서 주지 스즈키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일본
외무성의 요인들을 비롯한 여러 일본명사들과 접촉하였다. 또한 그는 이때
수신사로 도일한 김홍집을 만나서 친교를 맺었다.
이동인은 동경에서 데라다의 소개를 받아 당시 외교가로 명망을 떨치던
후쿠자와와 교류하기도 하고, 일본, 중국의 유지들의 간친회로서 아시아 및
세계정세를 분석하고 구미제국에 대항한다는 명분 아래 제국주의의 마수를
뻗치려던 흥아회에 출석하는 등 조야의 정계, 재계의 유력자들과 교유의 폭
을 넓혔다. 그리고 많은 서적과 자료 등을 오쿠무라에게 부탁하여 김옥균
등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80년 8월 이동인은 제2차 수신사로 와서 아사쿠사 관음사에
유숙하던 김홍집과 만나면서 조선정계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계기가 되
었다.
김홍집과의 면담 이후 급격히 그와 가까워진 이동인은 수신사 일행이
1880년 9월 16일 일본을 떠나 귀국하자 이들 일행과 함께 귀국, 9월 28일
귀경하였다. 귀국 직후 김옥균 등에게 서적 및 기타 자료를 건네주었다. 이
동인이 귀국할 때 혼간 사에서는 이동인에게 쌀 2백 가마 값에 해당하는 일
화 1천 엔을 주었다. 이 돈으로 이동인은 램프, 석유, 잡화 등을 들여와서
왕실, 세도가와 친지들에게 선물했는데, 이것이 조선인에 의해 일제상품이
서울로 들어온 최초였다.
김홍집은 귀국 직후 왕비의 조카로서 보수파의 거두인 민영익에게 이동인
을 소개하였다. 민영익은 이동인을 만나보고 그의 식견이 탁월함에 경탄하
여 자기의 사랑방인 연당에 거처를 정해주고 여러 차례 국왕에게 알현토록
주선하였다.
이동인은 일본국정의 견문, 분석은 물론 세계의 정세와 이에 대처할 조선
왕조의 방책을 상주하여 고종을 감복시킨데다가 김옥균 등의 강력한 조언에
힘입어 크게 중용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의 밀사로서 그해 10월
에 재차 도일하였다. 이동인의 제2차 일본행은 조미수호통상조약교섭의 알
선을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의뢰하는 고종의 밀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11월 19일 하여장 청국공사를 찾아가 고종의 밀명을 이행하였다. 한편 국
내에서는 대원군과 그 당료들이 고종의 개방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고
종의 밀명으로 일본에 밀파된 이동인이 귀국하면 제거하기로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이 정보를 접한 유대치가 급거 부산으로 달려갔다.
귀국한 이동인은 동래부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나 유대치의 주선으로 7일
만에 석방되어 1881년 1월 초순에 상경하였다. 서울 도착 즉시 이동인은 국
왕으로부터 별선군관에 임명되어 자유로이 왕궁을 출입, 고종과 대담하고
진언하기에 이르렀다.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으로서 이동인은 1881년의 신
사유람단을 일본에 보낼때도 막후에서 활동하였으며, 총포 등의 무기와 군
함을 구입하기 위해 일본과 비밀교섭도 벌였다. 이원회와 같이 이 일을 추
진하던 이동인은 1881년 3월 1일(혹은 5월)경 갑자기 증발해버렸다. 당시 정
치적인 이유로 반대파 누군가의 하수인에 의해 암살되어 그 흔적까지 깨끗
이 치워진 것으로 사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이동인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878년 6월, 통도사 승려로서 혼간
사 부산별원에 나타남으로써 그 모습을 드러냈으나, 그는 격변하는 한말의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일본불교를 통해 개화문물과 개화사상을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가 정적에 의해 일거에 제거되고 말았다. 1880년 10월 재차 도일하
였을 때 아사노 도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또한 그 전해에 일본 진종 승려
가 된 행적 등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일본 불교가 획책한 조선침략의 그물
에 걸려든 본격적인 친일 개화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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